[제181호] 6.25 전쟁에 순국한 김중만 동문(경제 49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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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치열하던 1951년 8월 13일 경제학과 49학번 김중만 동문이 강원도 인제에서 전사했다. 23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전사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사망일자와 장소로 보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에서 벌어진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한국군은 그 해 9월초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으나,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반격,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에 평양을 거쳐 11월에는 압록강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 때 수십만 명의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여 1951년 2월에는 경기도 평택까지 밀렸다가 재 반격, 3월에는 서울을 재탈환 하였다. 그 후 전선이 교착되자 양측은 휴전을 모색하게 되어 7월 10일 휴전회담을 개시하였으나 북한 측이 경계선 문제로 부당한 주장을 함에 따라 회담이 중지되었다. 그 후 강원도 일대 여러 전선에서 고지 확보를 위한 전투가 다시 벌어졌고, 그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가 노전평 전투였다.
김 동문은 1928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여 그 곳에서 국민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는 서울로 올라와 경기중학교를 다녔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로, 중학교 졸업자가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는 경우 먼저 전문부에서 2년을 수료하면 학부(본과)에 진학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는 1946년 서울상대 전문부에 입학하여 1948년 졸업과 동시에 학부에 진학했고, 이 무렵에 동갑내기 부인 허은남 씨와 결혼했다.
고 김중만 동문과 부인 허은남씨
김 동문은 전문부 시절부터 조부가 마련해 준 청량리 가게에서 고무신을 팔며 생활비를 마련했다. 본과 3학년이던 1950년 6월 3일에는 딸이 출생했다. 하지만 딸이 채 옹알이도 하기 전인 6월 25일에 전쟁이 발발하여 아버지, 어머니와 사촌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북한군과 소통하던 아버지의 친구가 신고해 잡혀 끌려가다가 가까스로 탈출하면서 큰 결심을하게되었다.“ 이렇게숨어만다니면 언젠가는 또 다시 북한군에게 붙잡혀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1950년 12월 부산에서 자원입대하였다. 부산 육군훈련소에서 단기 훈련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1951년 8월 13일 노전평지구 전투에서 산화한 것이다. 올해가 꼭 그의 70주기가 된다.
이 글은 지난 3월 10일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에서 발간한 <서울대 순국·참전 동문 이야기> 중 김 동문의 이야기를 재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는 김 동문 외에도6.25 전쟁에 참전·순국했던 다른 단과대학 동문 8명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김 동문의 이야기는 자유전공학부 송주상 학생이 추적, 기록했다.
6.25 전쟁에서 17만여명의 한국군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고, 그 중 13만 5천여명의 유해가 아직 수습되지 못하고 있다. 군에서는 전쟁 발발 반세기만인 2000년 4월에 유해발굴사업을 시작하여 그 동안 1만 2천여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나 그 중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는 164명에 불과하다. 남북관계가 진전되면서 지난 2018년 남북한 공동 유해 발굴에 합의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한국 측의 일방적인 작업만 계속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고 김중만 동문의 유해는 아직 발굴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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