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장의 사진

[제 183호] 경성고등상업학교 근로보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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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와 관련하여 사진을 제공해 주신 민경효 동문님(상학 57학번)과 일어(日語) 서적을 번역해 주신 최정규 동문님(경제 58학번)께 감사 드립니다.

위 사진은 1939년 여름 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고상) 근로보국대가 성북구 종암동에 신축 중인 학교 운동장 정지(整地)작업을 하기 위해 동원된 모습이다. 경성고상은 서울상대의 전신으로 그 이전에는 종로구 명륜동(당시 명칭 숭이동)에 있다가 종암동으로 이전하기 위해 새 교사(校舍)를 짓고 있는 중이었다.

이 자리는 원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경성여의전)에서 학교를 짓고 있던 곳이었다. 경성여의전은 1938년 5월에 개교하고, 개교와 함께 종암동에 학교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 해 11월에 경성고상이 이를 인수하여 공사를 계속해 왔다. 다음 해인 1939년 여름에는 건축공사는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으나 운동장이 황무지나 다름없어서 학생들이 정지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정지작업에 2, 3학년 학생들은 희망자만 참여하고, 1학년 학생(1939년 4월 입학)들은 전원 동원되었다.

학생들이 작업에 동원된 것은 관계법령에 의해서였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대량의 인적·물적자원이 필요하게 되자 1938년 4월“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각종 군수물자와 인력을 동원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법령에 대상이 아닌 학생·여성·농촌인력들의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기 위해 그 해 7월“국민정신총동원근로보국운동 규정”을 제정하여 학교별, 지역별, 단체별로 근로보국대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이 규정에 따라 경성고상에도 근로보국대가 편성되어 운동장 정지작업에 동원된 것이다.

근로보국대는 1938년 6월에 학교근로보국대가 먼저 편성되었고, 이어서 지역별 근로보국대와 단체별 근로보국대가 차례로 결성되었다. 그리고 필요한 노동력을 강제로 할당하는 방식으로 강화해 나갔다. 1939년부터는 만주와 사할린으로 동원하는 흥아청년근로보국단과 화태개척근로대를 편성하고, 1940년부터는 조선 남부지방에서 북부지방으로 동원하는 특별근로보국대, 1941년부터는 일본으로 동원하는 조선농업보국청년대 등을 편성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던 것이다. 이 시기에 경성고상 근로보국대에서는 운동장 정지 외에 다른 작업에 동원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학교의 경우는 동원기간이 처음엔 방학기간 중10일 정도에 그쳤으나 전쟁이 격화된 이후에는 1년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작업도 송진이나 자갈 채취작업에서부터 토목건축 및 운반, 도로·교량의 건설·수리, 하천 수리, 황무지 개척 등으로 확산되었다.

일부 학교에서는 병역숙박 훈련과 군사훈련까지 실시했고, 일부 학생들은 졸업 후 전쟁터에 끌려가기도 했다. 여학생의 경우 타자수, 세탁원 등으로 일하다가‘백의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간호사로 동원되기도 했다. 경성고상 근로보국대가 심한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은 당시 경성고상에는 일본의 상류층 자제들이 많이 다녔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경성고상 종암동으로 경성고상은 그 해 9월에 종암동 교사 신축공사를 끝내고 10월에 신교사(新校舍)로 이전했다. 명륜동 구교사를 출발하기에 앞서 학생들은 제복에 집총(執銃)을 하고 대검(帶劍)을 차고 전원 본관 앞에 정렬하여“호다루노히카리”(螢の光)라는 노래를 합창했다. “螢の光”은 곧 반딧불을 뜻하는데, 반딧불과 달빛 그리고 흰 눈(雪)빛으로 부지런히 책을 읽자는 내용이며 곡은 스코트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을 붙였다.

합창이 끝난 후 학생들은 명륜동 구 교사를 출발, 돈암동을 거쳐 종암동 신 교사까지 도보로 행군을 했다. 행군 병력(?)은 약 300명. 당시 2,3학년 학생들은 종전대로 검은 제복, 검은 모자에 머리는 긴 머리도 허용되었으나 1학년(1939년 입학) 학생들은 제복은 국방색, 모자는 전투모에 단발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전교생이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했다. 중일전쟁이 치열한 시기에 긴장감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종암동 교사에 도착한 학생들은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명륜동 교사는 붉은 벽돌에 담장이 덩굴이 덮이고 벚나무가 우거진 정취 있는 건물이었는데 새 교사는 메마른 개울가에 3층짜리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덩그렇게 서 있는 황량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새 교사로 이전한 경성고상 학생들은 우선 통학하는 길이 달라졌다. 전차를 타고 학교로 가려면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청량리 종점(현 1호선 청량리역 위치)에서 내려 홍릉을 거쳐 걸어오는 방법이 있고, 성동역(현 1호선 제기역 위치)에서 내려 정릉천을 따라오는 방법이 있었다. 당시 청량리 역에서 경성고상까지는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이 숲을 향상(向上)의 숲 또는 향상림(向上林)이라고 불렀다. 그 후 도시가 개발되면서 소나무 숲은 상과대학 구내에만 남아 있게 되었다.

지금은 경춘선이 청량리역에서 출발하여 춘천역까지 가지만 당시에는 성동역에서 출발하여 성북역과 월곡역, 청량리역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경성고상이 종암동으로 이전한 후 성동역과 월곡역 사이에 고상전(高商前)이라는 역을 만들어서 성동역에 내린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줬다. 고상전이란 “경성고상 앞”이란 뜻이다.

경성고상이 종암동으로 이전한 후 학생들의 근로동원은 더욱 강화되었다. 1941년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각급 학교도 전시체제로 들어 갔다. 경성고상은 수업연한을 3년에서 2년 9개월, 2년 9개월에서 다시 2년 6개월로 단축하고, 졸업 즉시 입대시켰다.
1943년 10월에는 “교육에 관한 비상조치방책”을 결정하여 한편으로는 경성고상을 포함한 전문학교의 명칭을 개편하고 전문학교 학생들을 현역병으로 징집했다. 이 때 경성고상은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합병하여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칭했는데 사실상 경성법학전문학교를 폐지하는 조치였다. 또 1944년 4월에“학도군사교육요강 및 학도동원비상조치요강”을 발표하여 학생들의 근로동원을 본격화 했다. 이 조치에 따라 경성고상의 3학년생 약 50명은 경성부(京城府, 서울시) 부청(府廳)과 체신국, 교통국, 도청 등에 사무직으로 동원되고, 2학년생 200여명은 육군 평양항공창에 동원되었다. 다음해인 1944년 8월에는 학도근로령을 공포하여 전쟁 관련 산업부문에 학생들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이 법령에 따라 1945년 5월 경성고상 신입생 200명과 2학년생 중 잔여인력들이 진해, 인천, 경성, 함경북도 성진(城津) 등지의 군수품 공장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공장에서 부실한 식사에 밤낮으로 중노동을 하다가 3개월 후 8.15 해방과 함께 학교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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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여의전은 명륜동으로 경성고상에 학교부지를 넘겨준 경성여의전. 경성여의전은 1938년 5월 개교하여 개교 직후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병리학교실을 빌어 수업을 했다. 그 후 성북구 종암동에 학교부지를 마련하여 교사를 신축하다가 그 부지를 경성고상에 인도한 후에는 명륜동 경성고상 본관 뒤편 구교사로 이전하여 수업을 했다. 그리고 경성고상이 종암동 교사를 완공시켜 이전한 다음 해(1940년)에는 경성고상의 명륜동 구교사를 정식으로 인수했다.

명륜동으로 이전한 경성여의전은 다음해인 1941년 부속병원을 준공하여 본격적인 의료교육기관이 되었다. 광복 후인 1948년 서울여자의과대학으로 승격했
고, 1957년에는 남녀공학으로 개편하여 수도의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다. 1966년에는 국학대학(國學大學)을 인수하여 종합대학인‘우석대학교’로 개편했
다. 우석대학교는 1971년 경영난에 부딪쳐 고려대학교에 인수됨에 따라 다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과 그 부속병원이 되었다. 20년 후인 1991년 10월에는 성북구 안암동에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을 신축하여 이전했다. 우리에게 수도의대로 기억되고 있는 구 경성고상 자리에는 지금“창경궁 뜰 아남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단지 입구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터”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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