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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호] 6·25 전쟁 중 서울대학교 부산 가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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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가교사 본관

 
서울대학교는 1946년 10월 15일에 개교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도 지나지않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바로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서울 시내 각 대학은 제대로 피난할 겨를이 없었다. 서울대학교도 많은 수의 교수와 학생들이 서울에서 발이 묶였고, 일부 학교 건물이 불탔으며, 귀중한 각종 실험기자재와 장서들이 북한군 수중으로 넘어갔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서울대 최규동 총장 등 상당수 교수들이 납북되었고, 많은 학생들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 전쟁터에 내 몰렸다.
남쪽으로 피난한 학생들의 경우에도 많은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전투에 나섰고, 그 중 서울대 학생으로서 확인된 전사자만도 29명이나 된다. 또 9·28수복 이후에는 서울에 남았던 교수와 학생들이 부역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일부는 파면, 정직 등의 처분을 받거나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서울대학교는 1951년 1.4후퇴 때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 후 전쟁은 38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소강 상태가 계속되며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문교부는 5월 4일 조치를 내려 부산을 비롯한 전국 6개 지역에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했다. 피난을 내려간 교수와 학생들은 각자의 피난지에 설치된 연합대학에서 수업을 받았다.
학생들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한 학생들이 많아 부산연합대학의 학생수가 전체의 66%를 차지했다. 하지만 피난지 부산에서의 교육 여건은 너무나 비참했다. 전란으로 인한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은 물론, 수업을 할 수 있는 공간조차 없었다.

피난 직후에는 노천에서 수업을 했다. 맨 땅에 가마니를 치고 나무 판대기로 책상을 삼아 공부했고, 때로는 해수욕장의 탈의실을 교사(校舍)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그 해 4월 문교부는 학부형이 자재를 부담하고 교수와 학생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가교사 건축 계획을 수립하여, 동년 10월에 건축을 시작하였다.
가교사 건축에 있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과 공과대학,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등 5개 대학은 부산 서대신동 일대에 부지를 마련했고,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치과대학, 약학대학, 농과대학, 예술대학 등 다른 대학과 사무실, 도서실, 실험실은 각기 다른 곳에 세워졌다.

상과대학의 경우는 부산시 서대신동 3가 95번지에 가교사를 지었다. 비록 임시교사이기는 하였으나 5개의 대강의실, 학장실, 교무과장실, 학생과장실, 교수실, 호국단실, 학예부실, 3개의 교실과 강당, 32평의 도서관과 22평의 사무실 등을 구비하였다. 이 시기에 학생 정원은 1,200명, 재적 학생수는 966명이었으나 약 700명의 학생이 등록하여 경제학과와 상학과로 나뉘어 수업을 들었다. 이 때 교수진은 교수 5명, 부교수 2명, 조교수 5명, 조교 10명 등 22명이었고, 사무직원이 9명 있었다.

1951년 5월 시작된 전시연합대학 체제는 약 1년간 계속되다가 다음 해인 1952년 5월 31일 해체되었다, 이에 따라 다른 지방에서 수강하던 서울대 학생들은 모두 부산의 본교로 복귀하여 교육이 일원화되었다. 다만 농과대학은 1951년 원래의 수원 캠퍼스로 복귀하고, 나머지 대학은 부산 가교사에서 강의를 계속했다. 서울대학교가 독자적인 수업을 실시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교사(가교사)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부산 가교사에서의 수업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서울 캠퍼스로 복귀할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과대학은 8월 19일에, 대학 본부와 문리과대학은 9월 15일에 각각 복귀했다.

전시연합대학
전시연합대학은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각 대학의 개별적인 운영이 불가능해 지자 문교부 조치에 따라 마련된 합동교육 체제를 말한다. 전쟁 발발 후 북한군의 공세에 밀린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전했고 서울 시내의 각급학교는 정상적인 교육을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되자 시내의 초·중등학교는 10월 16일 개학을 했다. 그런데 대학의 경우 약 4개월 간의 전란 중에 교실 1,750개 중 1,540개(건평으로 52,500평 중 46,200평)가, 사범학교는 교실 955개 중 592개(건평 28,600평 중 16,234평)가 파괴되었다. 이에 따라 각 대학의 개별적인 수업이 불가능해지자 11월 2일 합동수업의 형태로 시작된 것이 전시연합대학의 시초였다. 당시 서울시내에 있었던 31개의 공사립대학을 합하여 법정, 경상, 이학, 공학, 농학, 문학 등의 7개 학부와 가정학과, 신학과를 포함한 단일연합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그 운영은 각 대학과 중앙교육위원회의 대표 및 문교부 장·차관 등으로 구성된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담당했다.

서울수복 후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그 해 11월 경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밀렸고, 1951년 1.4 후퇴 때는 각 대학들이 부산 등지로 피난했다. 그 직후인 2월 10일을 전후로 피난지의 각급 학교가 개학을 하게 되자 각 대학도 전시체제 하에서의 개강을 서두르게 되었다. 즉,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지에 있어서는 국공립 및 사립대학이 모여 대학연합체를 구성하고 그 곳에 피난해 온 학생들을 수용하여 부산의 경우는 2월 19일 개강식을 했다. 이로써 대학생들은 전란 속에서도 다시 학원생활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전시연합대학은 그 해 5월 4일 문교부령 제19호로 공포된‘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 조치령’에 의해 법제화되었다. 연합대학은 먼저 부산, 광주, 대전, 전주등 4개 지역에 설치되었고, 이후 청주와 대구에도 추가로 설치되었다. 전시연합대학에서는 단과대학을 문학부, 이학부, 의약학부, 농수산학부, 법정경상학부, 수의학부, 예술학부, 체육과, 가정과로 재편성하였고, 교육과정은 정상운영이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약식으로 조정하여 주로 교양과목들로 운영하였으며 군사훈련의 배점이 높았다. 1951년 12월 기준 전시연합대학생 등록 수는 총 6,455명으로 부산 4,268명, 대전 377명, 전북 1,283명, 광주 527명이었고, 교수 수는 444명이었다. 전시대학을 운영하기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은 최규남 문교부 차관 겸 서울대학교 총장이, 부위원장에 는 강세형 국학대학장이 선임되었으며 운영경비는 국립서울대학교 및 국립부산대학교의 예산을 사용하였다.

부산전시연합대학은 강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강의 내용은 인문, 사회, 자연계를 막론하고 전시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강의하였다. 강의 방식은 오전에는 전학생을 부민관(부산 동광동에 있었던 극장) 한곳에 모아 놓고 교양 과목인 헌법, 변증법, 현대의 자연과학, 원자론, 사회사상사, 민족이론, 마르크스주의 비판, 국제헌장, 민족해방운동사, 전쟁과 사상, 민족주의의 개설 등을 주제로 합동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전공과목을 강의하는 방식이었다.

강의실은 따로 마련된 것이 아니고 유휴 건물이나 개인 사무실, 교수 사택, 창고 등을 임시 교사로 사용하였다. 전공과목 가운데 문학부 A반(어학·문학)은 서구 부민동 1가 31번지의 어느 유휴 건물에서, 문학부 B반(철학, 사학, 교육학)은 영도 남항 공설시장 부근의 해동중·고등학교 임시 교사의 일부를 빌려서, 법정·경상학부는 부민동 1가 10번지 소재의 변재성(卞在成)법률사무소에서 각각 강의하였다.

전시 체제하에서 대학교육은 학과 수업과 아울러 군사교육이 실시되었다. 1951년 11월 이후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4시간씩 군사기초훈련을 실시했는데 군사훈련의 학점수는 2시간에 불과했으나 필수과목으로 부여되었다. 다만 여학생들은 체육 및 가사 수업을 받도록 했다. 이 군사훈련은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다음해인 1954년 7월에 해제되었다.

부산연합대학은 부산대학교의 교수와 직원의 참여도가 높았고, 등록 학생의 대부분이 부산대학교 학생이었으므로 사실상 부산대학교를 모체로 하고 있었다. 동아대학교는 본래의 위치에 있었고, 별도의 교사가 마련되어 있어 전시연합대학에는 편입되지 않았다. 세계 교육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으로 사전에 계획하였던 것이 아닌 만큼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도 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문교부는 1952년 3월부터 전시연합대학을 해산하고, 학생을 원교로 복귀하고자 하였으나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서울에 복귀하지 못한 대학들이 있었다. 서울대학교는 1953년 9월 복귀할 때까지 부산캠퍼스를 본교로 하고 서울캠퍼스를 분교로 하여 서울 거주 학생들이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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