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호] 위기를 기회로, 오일쇼크에 일궈낸 중동건설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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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위기일 때 나한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지난 해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 나라의 산업생산은 마이너스 0.8%의 성장을 기록, 2000년 이후 첫 감소를 보였다. 그나마 이 수치는 산업전체의 평균이고, 숙박·음식업은 18.5%, 운수·창고업은 14.2%, 스포츠·레저는 33.0% 감소하는 참담한 모습을 보였고, 이런 상황 때문에 취준생들은 고용절벽 앞에 서야 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겐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끈질긴 DNA가 있다. 1970년대 국제유가 폭등으로 온 세계가 오일쇼크를 겪고 있을 때 우리 건설업체들은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하여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고, 이는 1980년대 중화학공업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또 1997년 아시아지역에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과 정부의 금융구조조정 정책을 통해 가장 먼저 위기에서 벗어나고 금융제도를 새롭게 구축한 바 있다.

지난 1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 전시회‘CES 2021’에는 로봇, 인공지능, IoT(사물인터넷) 등을 활용한 스마트홈·비대면 기술이 대거 등장했다. 이 행사에 한국은 345개 업체가 참여해 세계 2위를 기록했고, 올해 전체 CES 혁신상의 4분 1에 해당하는 총 100개의 혁신상을 수상했다. 한국기업들이 이번 코로나 팬데믹 위기를 기회로 살려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특집에서는 1970년대 건설회사에서 중동신화를 일궈낸 3 동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DL(옛 대림산업) 이준용 회장(경제 56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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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옛 대림산업)은 1939년 창업주 이재준이 설립한 부림상회를 모체로 한다. 초기에는 건축자재와 원목 생산을 취급했으나 1947년 건설업에 진출하면서 사

명을 대림산업으로 변경했고, 올해 초 다시 DL로 변경했다.

DL은 한국전쟁 전후로 굵직한 건설공사를 맡으며 사업을 키워나가다가 1966년 1월 미 해군시설처에서 발주한 베트남의‘라치기아’항만 항타공사를 수주했다. 1964년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고, 1965년 미국의 요청에 따라 한국군도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국내 건설업체들이 베트남에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

다. 당시 베트남은 열대 기후에 전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공사를 추진하는 것은 사운(社運)과 직원들의 생사를 건 모험이었다. 하지만 DL은 과감한 결단으로 이 공사를 수주하고 공사 착수금을 한국은행에 송금함으로써‘해외건설외화 획득 1호’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공사를 계기로 이재준 사장은 해외건설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1966년, 장남 이준용 동문을 대림산업에 입사하도록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미국 덴버대

학에서 통계학 석사 학위를 받고 영남대와 숭실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중이었다.

DL에 입사한 이준용은 유창한 영어실력과 해외경험을 바탕으로 해외공사 수주에 주력했다. 그의 지원으로 DL은 브루나이·태국·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지역의 공사를 잇달아 수주했고, 1973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사우디·미국 합작석유회사)가 발주한 정유공장 보일러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국내 최초의 중동 진출에도 성공했다.

1973년 국제유가 급등으로 세계경제가 불안에 휩싸였으나(오일쇼크), 그 후 중동 산유국에는 오일달러를 기반으로 한 건설붐이 일어났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DL은 1975년 국내 최초로 쿠웨이트의 정유공장 보수공사를 수주했고, 이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유공장 건축공사를 맡아 아프리카 지역“진출 1호”의기록을 남겼다.

1980년대 이후에도 DL은 중동과 동남아 일대에서 플랜트, 댐, 도로, 항만, 공공주택 등 공사를 수행했는데 이 때 벌어들인 자금으로 다양한 업종의 기업을 인수 또는 설립,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대규모 기업집단(그룹)으로 발전했다. 특히 1979년에는 호남에틸렌을 인수하고, 1999년에는 한화석유화학과 함께 여천NCC를 설립함으로써 기존의 건설부문과 함께 석유화학 부문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준용 동문은 사장(1979년), 부회장(1988년), 회장(1993)이 되어 그룹을 운영하다가 2001년에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동안 그는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 부회장(1994~97년)을 맡아 기업들의 문화예술지원활동을 촉진했으며, 각종 재해로 인한 피해자들에게 수십억원씩의“통큰 기부”를 해 왔다. 또 2016년 재단법인‘통일과 나눔’에 ㈜대림 지분(2000억원 상당) 기부, 2019년 재단법인‘바보의나눔’에 서울 광화문 자택 기부, 대림수암장학재단에 30억원 기부, 2020년 서울대에 ‘대학혁신발전기금’10억원 기부 등“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고 음용기 고문(경제 60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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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은 1947년 현대토건사로 설립되어 1950년 주식회사로 전환된 후 급성장을 거듭했다. 1965년에는 국내 건설사 최초로 해외공사(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했고, 이어 괌, 월남, 알래스카, 호주, 미국 등지에서 큰 공사를 맡았다.

1970년대 초 국제유가가 폭등(오일쇼크)하면서 중동에 건설 붐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동 지역의 경우 공사의 마스터플랜은 미국 용역회사가 담당했고, 개별 프로젝트의 기본설계와 발주대행은 영국 용역회사들이 맡았다. 따라서 중동 국가들이 발주하는 공사에 입찰자격을 얻으려면 영국 회사들로부터 시공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앞서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조선 및 자동차산업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영국 런던에 해외사무소를 두었다. 사무소를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영국에 둔 것은 런던이 세계적인 금융, 보험, 해운의 중심지인 데다가 일본이 한국의 급속한 공업화를 견제하는 데 비해 영국은 사양화 단계에 들어선 조선과 자동차공업에 관련된 기술을 한국으로 이전하는 문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고 음용기 동문은 1966년 현대건설에 입사하여 1971년 이후 런던사무소에 파견근무를 했다. 1976년에는 입사 10년만에 현대중공업 이사로 승진했는데 이 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주베일 산업항 건설공사가 발주되었다. 당시 현대의 공사실적만으로는 입찰자격을 받기가 쉽지 않았으나 음용기 이사를 중심으로 한 런던사무소는 그 동안의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 현대의 시공능력을 입증하여 입찰 자격을 받아내고, 수주 후에는 런던 소재 세계 일류은행의 보증을 받아 계약 체결을 성공시켰다. 공사금액은 무려 9억 6000만 달러로 우리 정부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규모의 공사로 기록되었다.

그 외에도 음용기 동문은 1978년까지 런던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이란 반다르 조선소 건설공사, 바레인 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사우디 해군기지 확장공사, 주베일 주택항 공사 등 대형공사 입찰을 지원했으며, 현대조선소 건설자금의 도입과 선박 수주, 현대자동차의 완성차 제조기술의 도입과 수출업무도 담당했다. 이 같은 지원에 힘입어 현대는 현대중공업, 현대엔지니어링, 현대미포조선, 아세아상선, 현대종합상사, 현대정공 등을 설립하여 조선, 자동차, 해운 등 업종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실적이 뒷받침되어 음용기 동문은 1987년에 현대미포조선 사장, 1988년에 현대종합상사 사장, 1991∼1998년에는 현대종합목재 사장을 역임한 뒤 현대중공업 상임고문을 지냈다. 현대종합상사 사장 재임 중에는 한·호주 경제협력위원장, 한·터키 경제협력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현대종합목재 사장 재임중인 1992년,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불법선거운동 혐의로 구속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99년 현대그룹을 떠난 그는 2000년 3월 벤처기업 이노티브를 창립하여 경영했고, 그 후 한국계면공학연구소 이사장을 지냈다. 이노티브는 대용량 영상 이미 지를 초고속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국내외 시장에서 주목을 받은 기업이다. 



동부건설 김기덕 감사(경제 61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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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건설은 1969년 미륭건설(주)로 설립되어 후에 동부그룹의 모태가 된 회사다. 해외사업을 목표로 1973년 1월 해외사업부를 신설한 후 1975년 4월 마침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해군기지공사를 수주했다. 이어서 사우디의 제다 해군기지 공사, 국방부 청사 건축공사, 리야드(수도) 국제공항 공사를 맡아 사업이 대규모로 확장되었다. 이 같은 실적을 바탕으로 미륭건설은 창업 10년도 안되어 국내도급순위가 6위(1978년)까지 오르는 대형 건설사로 발전했고, 1980년 중동에서 철수·하기까지 총 20억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이 자금을 기반으로 여러 업종의 회사를 신설또는 인수하여 그룹 체제를 구축했다. 미륭건설은 1989년 동부건설로 상호를 변경했다.

김기덕 동문은 대학졸업 후 삼척산업에 입사했으나 1971년 동부그룹으로 전직하여 동부고속, 동부종합상사 등에 근무했다. 1975년 4월 동부건설(당시 미륭건설)이 주베일 해군기지 공사를 수주하자 그 해 8월 동사 관리부장으로 발령을 받아 주베일 현장에 파견되었다. 김 동문은 현장에서 수주나 시공을 제외한 인사, 노무, 행정, 회계, 자금 등 관리업무를 총괄했다. 주베일은 나중에 현대건설이 들어와 본격적인 산업항 개발이 시작되었지만 당시만해도 사막 끝자락에 있는 한낱 어촌에 불과했다. 기후가 다른 데다가 도로, 전기, 수도 사정도 열악하여 자재장비의 운송, 작업의 진행, 근로자들의 숙식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 동문은 공사 추진에 만전을 기했고, 1년 후에는 제다 해군기지 공사현장으로 자리를 옮겨 거기서 2년 더 근무했다. 1978년 이사로 승진하면서 본사로 복귀했다. 그 후 상무, 전무,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자동차보험 등 금융회사 인수 또는 설립, 미국 기업과 함께 반도체 회사합작 설립, 동진제강(현 동부제철)과 울산석유화학(현 동부화학) 인수, 한농 및 계열사 인수 등 사세 확장을 이끌며 동부의 그룹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고려대에서 경영학 석사, 홍익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부터는 삼일회계법인상임고문과 동부건설 감사, 홍익대학교 회계학 교수로 있었고,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동부그룹 관계회사인 삼동흥산과 동곡사회복지재단의 회장을 지냈다.

한편으로 그는 문학에 심취하여 2005년에 월간 <한맥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하고, 2010년 <한국문인>에서 시로 등단했다. 또 2014년에는 에세이집 <한여름밤의 연가>와 시집 <종이배의 행로>를 출간했다. 그가 주베일 공사현장에 근무할때를 회상하며 지은 시 <아라비아 사막의 노을>이 시집 <종이배의 행로>에 수록되어 있다. 본보 3면 향상시단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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