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호] 뱃지의 추억 / 안문석 (경제 61학번,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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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집콕하며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서울대 총동창회에서 이메일이 왔다. 입학 60주년 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1961년 입학생에게 서울대 뱃지를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에 얼른 신청했고, 약속대로 서울대 뱃지가 집으로 배달됐다. 오랜만에 보는 뱃지는 나를 1961년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해 주었다.
지금은 사라진 대연각 호텔 지하에 있던 무학성 카바레에서 열린 1961년도 서울상대 신입생 환영회로 나의‘화려한’ 서울 생활이 시작 되었다 6.25 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7년, 전쟁의 상처가 아직 많이 남은 1961년 서울은 시골 출신인 신입생들에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군복을 검은색으로 물들인 작업복이 지방에서 올라온 대부분 학생들의 비공식 교복이었다. 구두는 군인들의 신발인 워커였다. 신사복과 신사화는 나에겐 너무도 먼 사치였다. 그러나 나를 주눅 들지 않게 한것은 바로 서울대 뱃지 였다. 작업복 왼편에 서울대 배지를 달면 가슴이 펴지고 걸음이 당당해졌다. 물론 버스 승차 시 할인혜택도 받았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왼쪽 가슴에서 대학 뱃지가 사라졌다. 그 시기가 1980년대로 기억된다. 군사정부(전두환) 시절 전국 대학가에 민주화 열풍이 불었고, 그래서 대학생들을 보면 가방을 뒤지는 등 검문이 일상화되다 보니 학생들은 뱃지를 달지 않게 된 것 같다. 그것이 문화가 되어 대학생들의 가슴에서 아쉽게도 뱃지는 자취를 감추었다.
입학 후 60년,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입학 당시는 서기(西紀)가 아닌 단기(檀紀)를 공식적으로 사용했었다. 서기 1961년은 단기로 4294로 끝 숫자가 4여서 우리 학번을 4천 학번이라고 불렀다. (대학가에서 학번을 서기로 호칭한 것은 1962년 부터인 것으로 기억한다.)
같은 경험을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것은큰 행복이다. 얼마 전 100세를 넘기신 연세대 명예교수님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나이 들면서 가장 힘든 것이 공통의경험을 나눌 친구가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맞는 말이다. 우리 4천대가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경험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110분 강의에 지친 우리는 강의 뒷부분이 되면, 누군가가 ‘그만합시다’를 외쳤다. 그러면 교수님은 못 이긴 척하고 조금 일찍 강의를 마치셨다. 나는 그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진학하여 강의 시간에 ‘그만합시다’를 외치다가 교수님께 찍혀서 혼난 일도 있었다.
독일어 시간에 강의도 끝나기 전에 용감하게 퇴실한 한 학형이 강의실 문을 밖에서 잠근 덕분에, 그 뒤를 따라나서던 학형들이 문을 흔들고, 그 소리에 강의실은 웅성거리고, 그래서 화가 나신 교수님이, 그 과목 수강생의 절반을 F학점으로 처리하신 일도 기억난다.
아스팔트 포장은 시내에서 안암동 로터리까지만 되어 있어서, 종암동에 있는 서울상대 앞길은 비만 오면 진창이었다. 어느 여름 날, 비가 엄청나게 내려 학교 앞 길이 진흙탕 길이 되었고, 그래서 모든 학우가 시멘트 담장을 타고 등교 하였다. 그날, 우리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셨던 영어 담당 여자 교수님도 담장 위를 걸어서 출근하셨다. 영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 때 변영태 교수님, 국정효 교수님, 장석진 교수님이 일주일 내내 영어를 가르치셨다. 세계화를 먼저 한 것이다.교양과목은 가까운 고려대 교수님이 대거 출강하셨다. 국어는 구자균 교수님, 심리학은 성백선 교수님, 영어는 변영태 교수님 등이다. 또 경제학과 학생들에게도 경영학 과목인 부기원리와 회계학을 필수로 공부하게 했었다.
법률 과목은 헌법, 행정법, 민법총칙, 물권법, 채권법, 상법을 배웠다. 독일어 원강(독일어 교재로 법학을 강의함)에 프랑스어 과목도 있었다. 수학과 통계학도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전공으론 가격론, 경제발전론, 케인스 경제학과 함께 자본축적론까지 다양한 시각을 섭력하도록 배려해 주셨다. 학문 중의 학문은 경제학이라고 강조하시던 경제학사(經濟學史) 최문환 교수님의 강의도 명강의였다.
서울상대 시절 내가 배운 법률 지식과 경제학 지식은 그 후, 내가 정부의 각종 위원회 위원장으로 일을 할 때 크게 도움이 되었다. 부기와 회계학 강의는 내가 공공기관의 이사나 이사장을 맡아서 봉사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서울상대 때 중단 없이 배운 영어 덕분에 사회생활이 순탄했었다.
뒤 돌아보니 종암동 서울상대는 내 마음의 고향이고, 나의 정신적 요람이다. 오랜만에 고려대학교에 갔다가 오는 길에 마음의 고향인 서울상대 옛 교정을 지나쳐 왔다. 멀리서 ‘향상의 숲’이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서울상대 입학 60주년, 지금 나는 수다를 떨 친구가 있고 마음의 고향이 있어서 행복하다.
오늘은 동창회에서 보내 준 서울대 뱃지를 운동모자에 달고 코로나로 움츠린 가슴을 활짝 펴고 산책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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