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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호] 향상장학회, 모교와 후배 위한 사랑의 역사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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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학재단 기본재산 3억원을 마련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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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 장학재단인 향상장학회는 1991년 12월 30일 설립되어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했다. 모교는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경영대학과 사회대 경제학부로 분리되었지만 장학재단의 이름은“서울상대향상장학회”로 하여 설립 이후 꾸준히 장학사업을 펼쳐왔다. 오로지 모교와 후배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다. 이번 2학기 장학금 수여를 계기로 그 탄생과정과 활동상황을 살펴본다.


본회는 1989년 11월 21일 당시 장예준 회장(상대 3회, 전 동자부장관)을 의장으로 하는 정기이사회에서 장학재단 설립에 관한 결의를 했고, 그 해 12월 14일 정기총회에서 재단 설립계획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다음 해인 1990년 1월 30일 개최된 회장단회의에서 재단 설립에 관한 구체적인 결정을 보았는데, 우선 재단의 명칭은 향상장학회(向上獎學會)로 하고, 재단의 이사는 기별 동창회의 추천을 받아 회장이 선임하기로 하였다. 장학회의 명칭을“향상”으로 한 것은 성북구 종암동 옛 서울상대 캠퍼스 내의 소나무 숲 “향상림(向上林)”과 그 안에 건립된 “향상의 탑”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명칭은 후에“서울상대향상장학회”로 변경하였다. 


그 해 2월 22일에는 운영위원회에서 각 기별 동기회장들에게 장학재단 설립의 취지를 설명하고 이사 추천을 당부하는 한편 재단 출연자를 물색, 타진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91년 2월부터는 장예준 회장과 출연 예정자들로 이사진을 구성하고 정관을 채택하여 발기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후 관계당국(서울시 교육청)과 협의하여 법인설립 절차를 밟았다. 그 결과 1991년 12월 30일에는 마침내 정부로부터 장학재단 설립의 인가를 받았고(서울시교육감인가 제1-141호), 1992년 1월 29일 재단법인의 설립등기를 완료하였다.


설립 당시 장학재단의 기본재산은 3억원으로 하여 그 중 1억 1천만원은 동문들이 출연하고 나머지 1억 9천만원은 동창회에서 조성했다. 이 때 동문들로서는 유성모직공업 박임원 회장(경제 50학번), 대림콘크리트공업 이준용 회장(경제 56학번), 두산그룹 고 박두병 회장의 유지로 설립된 두산연강재단, 고려아연 최창걸 대표이사(경제 60학번), 코리아제록스 문대원 사장(경영 71학번)이 각각 2천만원,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무역 66학번)이 1천만원을 출연했다.


그러면 동창회에서는 어떻게 1억 9천만원이라는 큰 금액을 출연할 수 있었는가?

동창회의 장학사업은 원래 1963년 6월 제2대 박두병 동창회장(고상 12회, 두산그룹 회장)이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장학금은 처음에는 재학생 2~3명 정도에게 지급하다가 나중에는 한 학년에 1명씩 모두 4명으로 지급을 확대했다. 이 때 장학금은 박두병 회장을 비롯한 부회장 등 임원들이 그 때 그 때 장학기금을 찬조하여 충당했으며, 1967년부터는 장학기금의 이자만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도록 하여 기금을 늘려나갔다. 한편으로는 동문들로부터 평생회비를 받아 동창회 기금으로 하였다. 평생회비는 한번 납부하면 이후 연회비는 면제해 주는 제도였는데 당시 평생회비는 1인당 5천원, 연회비는 500원이었다.


1972년에 이르러 장학기금은 약 320만원으로 늘어났고, 여기에 평생회비로 조성된 동창회 기금 약 480만원을 합하면 약 800만원의 기금이 조성되었다. 그러자 동창회는 장학금 지급액을 늘리면서(한 학기에 1인당 3만원에서 4만원으로) 장학재원을 더 확보하기 위해 모금사업을 일반회원에게까지 확대했다.

하지만 박두병 회장은 제7대까지 연임하다가 1973년 8월 타계했고, 그 후 제8대 김유택 회장(고상 12회, 한국자동차보험 사장)이 잠시 재임하다가 1975년 5월에는 제9대 이필석 회장(고상 15회, 국제화재해상보험 사장)이 취임했다. 이 때는 서울상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경영대학과 사회과학대학(경제학과, 무역학과)으로 분리되는 슬픔을 겪고 있는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필석 회장은 동창회를 굳건히 하는 것이 곧 서울상대의 역사를 잇는 것이라 판단하고 동창회 기금 조성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필석 회장은 회장단과 임원들로 하여금 일정금액의 기금을 찬조하도록 하고 각 직장지부를 통해서도 동문들의 연회비와 영년회비 납부를 독려했다. 이에 따라 첫 해에는 매년 회장은 100만원, 부회장은 25만원, 기타 임원은 10만원씩의 찬조금을 냈고, 그 다음 해부터는 회장300만원, 부회장 20만원, 이사 3만원으로 조정했다. 하지만 일부 부회장은 100만원, 감사는 50만원씩 납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회비는 초기에는 5천원에서 1만원으로 인상했다가 그 후 2만원, 2만원에서 다시 3만원으로 인상했다. 이렇게 모아진 기금은 주로 주식, 회사채 및 수익증권으로 운용했다. 당시에는 증권시장이 활황이었고, 회사채도 수익률이 높아서 기금 증식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동창회에서는 이 외에도 기금 마련을 위한 기념패 판매사업도 벌였다. 기념패는 동문들의 이름과 서울대학교 휘장, 뭉치자! 돕자! 빛내자! 라는 동창회 구호를 넣은 패로 1만원의 기금을 낸 동문들에게 증정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1976년부터 시작하여 11년간 진행되었는데 이 사업으로 동창회는 제작비용을 차감하고 1,990만원의 순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필석 회장은 제9대에서 제13대까지 연임하고 1985년 4월말 퇴임했다. 퇴임당시 동창회 기금회계에는 약 7,600만원이 적립되어 있었다.  


1985년 5월에는 이필석 회장의 후임으로 제14대 장예준 회장(상대 3회, 전 동력자원부 장관)이 취임했다. 장예준 회장도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기금 찬조를 독려했는데 회장은 100만원에서 150만원, 부회장은 20만원에서 100만원, 감사는 2~30만원, 이사는 5만원을 납부했다. 또 평생회비는 3만원에서 5만원으로 인상했다. 이 외에도 1988년의 경우 동창회에서는 각 기별로 기금액을 배정하여 약 3,600만원을 출연 받았으며, 1989년부터는 기념품(찻잔과 접시셋트) 판매사업을 벌여 제작비 차감 후 약 1,100만원의 순수익을 올렸다. 또 동창회 명부를 발행, 판매함으로써 발행비용 차감 후 약 2,600만원의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동창회 기금의 규모는 1987년 말 1억 4백만원으로 늘어나 최초로 1억원을 넘어섰고, 1990년말에는 2억 1천만원, 1991년 말에는 2억 5천여만원으로 늘어났다. 이에 동창회는 그 중 1억 9천만원을 장학재단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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