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호] 8·15 해방, 그날의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상대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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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학생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다 


서울상대의 전신은 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고상, 1944년 4월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칭)였다. 경성고상은 1918년 6월 조선총독부에서 설립, 운영해 오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철수한 후 1946년 8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경성고상은 설립초기에는 일본인 학생만 들어갈 수 있었으나 3.1운동 이후인 1923년부터 한국인 학생의 입학이 허가되었다. 한국인 학생 수는 처음에는 전체 학생수의 10%에 불과했으나 나중에는 30%, 해방 무렵에는 2/3 정도를 차지했다. 76년 전 8.15 해방 당시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감개가 어떠했는지 살펴 본다.


아래 글 중 한국인의 글은 <향상의 탑> 제38호(1977.12.10)에서, 일본인의 글은 숭릉회(崇겓會, 경성고상 일본인 동창회) 문집 <한알의 밀>(1990.11.1)에서 발췌했다. 일어 번역에 수고해 주신 최정규(경제 58학번) 동문께 감사 드린다.


다니 이치로(谷一걏, 당시 3학년)

나는 1945년 8월 15일. 황금정6정목(을지로 6가)에 있는 하숙에서, 친구와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종전(終戰)의 조칙(詔勅, 천황의 말)을 들었다. 아연했다. 당시 종로구역소(役所, 종로구청)에 근무 중인 친구들은 조선인들이 일장기를 개조한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만세!” “만세”를 연호(곞呼)했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내를 행진하는 조선인 데모대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다.

며칠 후 학교에 갔더니 현관 앞 마당에 일본인은 왼쪽에, 조선인은 오른쪽에 따로따로 줄을 지어 마주보고 서 있었다. 웅성거림이 조용해지고 일본인을 대표해서 다카하시 데이기치(高橋禎吉) 군이 작별의 인사말을 했다. 체격도 훌륭했으나, 그의 언동 역시 당당했다. 이를 받아서 조선인 대표 이영근(굃永根) 군이 고별사를 했다. 그의 말 중에 그는“학교는 우리가 경비대를 만들어 지키겠다. 군(君)들과 가족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데 지장이 없도록 경성역(京城驛, 서울역)까지 무사히 보내 드리겠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26회생이지만,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이것이 최후였다. 이날 졸업증서 수여는 없었으나 이 작별이 곧 우리들의 졸업식이 되었다.


김영곤(상대 5회, 당시 1학년)

1945년 4월 경성경제전문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일본의 패전무드와 함께 정상수업을 하지 못하고 교련(敎練)을 1주인에 6시간 이상 했는데 학교 가까운 곳 홍릉 숲에서 매일 포복 훈련을 시켰다.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 세례가 있었고, 9일에는 소련의 대일(對日) 참전이 보도되면서 누가 봐도 그 전쟁은 종말이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지금 생각하면 대담하게도 10일부터는 아예 등교를 포기하고 원주의 집에 내려가 버렸다. 따라서 8.15의 중대 방송도 집에서 들었다. 해방이 되자 며칠 후 일본인인 가네야스 교장은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교수 및 학생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이례적인 이별식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가네야스 교장은 일본의 한국 통치에 대해서 깊이 사과하고 한국의 장래를 축복하였다. 한국인 학생들은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았으며, 다른 학교들과는 달리 아무런 분쟁 없이 조용히 학교 접수가 이루어졌다. 이윽고 학생회가 조직되고 친일파숙청위원회가 발족되어 별다른 기준 없이 일본인 행세를 해 오던 지각없는 학생들과 일본인만 사귀어 오던 학생 등을 심판하여 몰매를 주는 등 민족의 정기를 발로하였다.


사토 가쓰노리(佐藤勝則, 2학년)

1945년 8월 15일. 종전(終戰). 8월 16일, 당시 함경북도 성진(城津) 고주파(高周波) 공장에 동원되었던 우리 학생들은 히지구로(肱黑) 선생 인솔 하에 경성(京城)으로 향했다. 8월 18일, 날이 아직 밝지 않은 이른 아침에 경성역에 도착하여 해산했다. 8월 19일 학교에 나갔다. 잠시 후 강당에 모여 가네야스(兼安) 교장의 말씀을 들었다. 말씀은 당연 무겁게 들렸고 때로는 침울했으나, 우리들이 사태를 냉정히 받아들여 흐트러짐 없이, 경거망동하지 말고 신중, 냉정하게 행동하라는 호소였다.

교장 훈시 후 모두는 정면 현관 앞에 모여고별식을 했다. 

일본 학생 대표는 “우리는 곧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남아 있는 한국 학생들은 항상 진리를 추구해서 숭릉(崇겓, 경성고상의 별칭)의 전통을 지켜 주기 바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에 한국 학생 대표는 “우리는 운명에 의해 작별하고 헤어지게 됩니다만, 어떻게든지 원기 있게 힘 내십시오, 남아있는 우리들은 숭릉의 전통을 지켜 나가겠습니다, 건강을 기원합니다”라고 끝을 맺었다. 이는 한일학생들의 만감(萬感)을 대표하여 모든 것을 모교애로 승화시킨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이었다. 사실 다른 학교에서는 일본인 학생들이 돌멩이를 얻어 맞기도 했으나 이와 같이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는 인사말이 정식으로 행해진 학교는 실로 드물었다. 이것만은 숭릉의 역사에 남겨 두고 싶다. 

아아! 모교여, 벗이여, 언제까지나 건재하고 행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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