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호] 김영회 (경제 34회)의 향가 이야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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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향가 창작법에 의한 <찬기파랑가>의 새로운 해독
지 난 호에 서 필 자는 지난 100여년 동안 신라향가를 표음문자가설에 따라 풀어 놓 았 기에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기 전에는 증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증명될 수 없는 이론을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제시하였고, 우리 연구자들도 덥석 그 이론을 물고 말았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가 배웠던 찬기파랑가 해독을 다시 한번 소개한다.
“열치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가는 것 아니냐 / 새파란 냇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구나 / 이로부터 냇가 조약에 / 랑(걏)의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 / 아아 잣가지처럼 높아 / 서리 모를 화랑이여”
그러나 향가가 표기된 한자를 표음문자가 아닌 표의문자로 보는 필자의‘신라향가 창작법’이론에 따라 해독하니 전혀 다른 내용이 나왔다. 위에 표음문자로 풀이한 내용과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목이 메입니다, 화랑도가 병들었음에 / 이슬 내린 새벽, 달은 흰 구름을 다스려 쫓아내 떠나가게 하였습니다 / 기파랑 그 대는 어찌하여 낭도들을 바로 잡으려 하였는가 / 기강이 해이한 낭도 여덟 명을 참수한 것은 물길을 다스림이었습니다 / 흐트러짐을 미워하였던 젊은이, 그대께서는 낭도들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던 분이었습니다 / 그대는 늪과 같이 느리게 흐르는 내 가운데 쌓인 흙과 돌을 치워내고자 했던 화랑이었습니다 / 낭도들의 기강을 지탱해 주려는 마음을 가진 화랑을 우리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 월성이 그대를 쫓아내었음이라 / 아미타불이여, 구천에 떠도는 기파랑의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 잣나무는 가지들을 높은 곳에 이르게 하기를 좋아 했습니다 / 눈이 여기 내립니다 / 꽃이 떨어집니다”
새로운 해독에는 상상도 못했던 사실이 들어 있다. 필자도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파랑이라는 화랑이 휘하 낭도 8명을 기강해이를 문제 삼아 처형하였고, 기파랑 역시 이에 대한 문책으로 처형되었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어느 역사서에서도 본 바가 없다.
그렇다면 찬기파랑가는 어떠한 배경아래 만들어졌는가. 우선 찬기파랑가는 신라 경덕왕대의 작품이다 . 경덕왕의 재위기간은 742~765년이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찬기파랑가의 배경설화에 따르면 765년 (경덕왕 24년) 3월 3일 경덕왕이 창작자인 충담을 불러와 그대가 이전에 지은 ‘찬기파랑가의 뜻이 매우 높다(其意甚高) 하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충담이 ‘그렇다’고 하였다. 두 사람간의 대화는 찬기파랑가가 우국충정에 대한 작품인것을 암시하고 있다.
필자는 본 작품이 만들어진 765년에 주목한다. 백제의 멸망이 660년, 고구려의 멸망이 668년, 당나라의 축출이 676년이었으니 삼국통일 전쟁이 끝난 지 백여년이 지나 신라는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나라는 평화에 젖어 있었고, 월성(왕궁)에는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태평시대가 계속되면서 화랑도의 기강이 해이해졌는데 그토록 아름다웠던 화랑이라는 꽃도 경덕왕 때에 이르면 낙화유수가 되어 여기저기에서 떨어져버렸던 것이다.
이때 기파랑이라는 화랑이 나타났다. 필자의 해독에 따르면 그는 무너진 화랑도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 과정에 서 그는 기강이 극도로 문란했던 8명을 강변에서 참수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기파랑의 처사에 대해 논란이 있었고, 왕실에서는 결국 그 책임을 물어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 기파랑이 처형된 때는 달이 맑은 밤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가던 새벽이었다. 형장에는 징소리가 울렸고, 징소리에 맞추어 형이 집행되었다. 작자 충담사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기파랑을 추모하는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 때 화랑도 제도가 폐지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후 역사는 급박히 흐르기 시작했다. 찬기파랑가가 만들어지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경덕왕이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즉위함으로써 신라 하대(下代,말기)가 곧바로 시작된다. 무수한 반란이 줄을 지어 일어났다. 화랑도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몸 바쳐야 할 젊은이들은 구심점을 잃고, 귀족들의 사병(私兵)으로 들어가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면서 나라는 극도로 분열되었다. 화랑제도의 소멸과 신라 망국의 역사는 동전의 앞 뒷면처럼 동시에 일어났다.
찬기파랑가의 끝 구절이 안타깝다.
눈이 여기 내립니다(雪是). / 꽃이 떨어집니다(花判也).
이 구절은 꽃으로 상징되는 화랑제도의 폐지를 의미하였다.
찬기파랑가는 사실상 화랑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타까운 만가였던 것이다. 찬기파랑가는 노래로 쓰여진 역사였다. 그
러나 지난 100여년 동안 우리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신라향가 창작법은 숨겨진 역사를 드러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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