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호] 한국전쟁과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맥아더 장군 / 최정규(경제 58학번)

작성자 정보

  • 편집부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d7064540035f84ab94c46299bdee64cd_1622515615_6578.jpg
 


두 사람의 우정과 정 판단이 대한민국 공산화를 막아내다 


최근에 유튜브를 통해서“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이라는 영화를 시청했다. 상영시간은 불과 4분 10여초. 맥아더장군의 출생으로부터 유엔군 사령관 퇴임까지의 일대기를 간추린 짧은 영화였지만 그 가운데 6.25 전쟁과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소개되어 나로서는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한반도 적화통일이 그들의 목표였다.

개전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9월 초에는 낙동강까지 밀려 우리나라는 공산화 직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미국이 신속하게 전쟁에 개입, 유엔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지원을 요청하고, 6월 27일에는 미군의 한국 파견을 결정했으며, 안보리는 7월 7일 유엔군 파견을 결정했다. 당시 소련은 마침 안보리에 불참하고 있던 때여서 거부권도 행사하지 못했고, 유엔군 파견도 무난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위대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유엔안보리가 이렇게 신속하게 유엔군 파견을 결정한 데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 6.25 전쟁이 터진 다음 날 그는 동경에 주재하고 있는 맥아더 장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북한의 남침을 알리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맥아더 장군은 당시 미국 극동군사령관과 일본 점령군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다. 국가원수가 직접 미군 사령관에게 요청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참으로 천행만행이었다. 그 때 우리나라는 일본과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어서 이보다 더 잘 미국에 전달할 방법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전화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바로 미국정부에 보고하여 유엔안보리의 결의를 얻어냈고, 이 결의에 따라 일본 동경에 유엔군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이후 미국, 영국, 호주 등 16개국이 이 전쟁에 참전하여 한국을 지켜주게 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판단력과 외교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위대하신 분이다!


이승만은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학위, 1910년에는 프린스턴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한국에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건너 가 재미 한인(韓人)들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거기서 그는 미국의 정부 요인들과 국제연맹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는데, 이 때 육군 소령으로 미국 전쟁부(국방성의 전신)의 정보장교로 근무하던 맥아더와 만나게 되었다. 그후 두 사람은 기독교 정신과 반공·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함께 하면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이승만은 바로 귀국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전쟁이 끝나면 소련과 함께 한반도를 신탁통치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이승만은“소련이 신탁통치를 하면 한반도가 공산화된다. 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그가 기피인물로 지정되어 여권을 내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있던 맥아더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출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귀국 전에 먼저 일본 동경에 들려 맥아더 장군과 며칠을 보낸 후 해방 후 2개월만인 10월 16일, 사령관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그런 인연으로 맥아더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및 건국선포식에도 부인과 함께 참석하며 이승만과의 우의를 다졌고, 2개월 뒤에는 이승만이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6·25가 발발하자 맥아더는 본국에 보고하여 유엔안보리의 결의를 얻어내는 한편, 6월 29일, 이미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위협 속에 한국의 전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수원비행장으로 날아와 이승만대통령과 요담한 후 한강방어선을 시찰했다. 여기서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기본 구상을 했다고 한다.

맥아더 장군은 1880년 미국 아칸소(Arkansas) 주(州)에서 출생하여 1989년 웨스트포인트(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아버지 역시 미군 장교로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둔 군인 집안이다.


1903년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고, 1919년에 육사 교장이 되었다. 1925년에 최연소 소장으로 진급했고, 1930년에는 중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1932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 다시 참전했으며, 1935년에는 필리핀 연방 정부의 군사 고문 겸 원수에 취임했다가 1937년 전역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소집되어 미 극동군 육군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44년 12월에는 원수(元帥, 5성 장군)가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1945년 9월 2일, 맥아더 원수는 일본 동경만(東京灣)의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고,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로 부터 며칠 후인 9월 27일 그는 주일 미국대사관에서 일본의 쇼와(昭和)천황의 예방을 받았다. 이 때 기념 촬영에서 맥아더 원수는 정복이 아닌 평상복차림에 편안하게 뒷짐을 지고 있었고, 일본 천황은 정복차림에 꼿꼿한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이 일본 국내에 발표되자 일본인들에게는 천황이 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져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1951년 4월 10일까지 5년 5개월간 일본을 통치하면서 전후(戰後) 복구와 법질서 회복에 주력했고, 일본에 미국적인 민주주의를 뿌리깊게 심어 오늘날의 눈부신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이 때 많은 일본인이 그를 신처럼 숭배했다고 한다.


1950년 7월 7일 유엔안보리가 한국에 유엔군을 파견하기로 결의하자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무렵 맥아더는 이미 구상하고 있던 인천상륙작전을 본국에 보고하였으나 미 국방성은 이에 반대하여 난관에 부딪쳤다. 하지만 그는 아군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도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표를 찔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9월 15일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을 결행, 성공하여 단번에 전세를 뒤집어 놓았다.

이후 낙동강까지 내려갔던 북한군은 보급 차단으로 지리멸렬하게 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 10월 1일에는 3.8선을 돌파했으며, 10월 14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일부 사단은 압록강까지 진출했다.


그러자 중국은 수십만 명의 중공군을 투입시켜 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해 들어왔다. 전세는 다시 아군에게 불리하게 되어, 그 해 12월에는 흥남철수를 해야 했고,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내주고 남으로 후퇴(1.4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유엔군은 반격을 시도했으나 계속 밀리다가 2월 하순에 전력을 갖추어 반격,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24일에는 다시 3.8선을 돌파했다.


d7064540035f84ab94c46299bdee64cd_1622516245_5654.JPG


이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그 동안 내세웠던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다시 유엔에 제시했다. 또 맥아더 장군은 이 기회에 만주를 폭격하고, 핵무기로 중공군을 섬멸하여 대만(臺灣)의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이끄는 자유중국의 본토 수복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소련의 개입을 불러 일으켜 미 군사력에 위협이 된다며 거부 당했다. 오히려 미국무성은 현 상태에서 휴전을 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그 취지를 맥아더 장군에게 도 전달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이를 무시하고 유엔의 목적(통일정부 수립)을 달성하기 위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본국 정부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에 트루만 대통령은 4월 11일 전격적으로 맥아더 장군을 해임했다. 여기서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해임한 데에는 명령불복종이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개인적인 감정도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맥아더 장군은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화려한 전공을 세워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국방성 고위 장교들이 모두 그의 후배인 분위기여서 그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38선 돌파와 압록강까지 북진, 압록강 교량 폭격 같은 중요한 군사작전을 실행하면서 사후 보고형식으로 승인 받았다.

전쟁이 한창일 때 트루만 대통령이 태평양 한 가운데 wake 섬까지 날아와 맥아더 장군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는데 맥아더 장군은 대통령에게 경례조차 하지않고 악수만 했다고 한다. 


맥아더 장군을 해임한 트루만 대통령은 그의 후임으로 릿지웨이(Ridgway, M.B.) 제8군사령관을 임명했는데, 신임 사령관은 확전(擴戰)이 아닌 제한전쟁을 목표로 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공세와 유엔군의 역공세가 되풀이 되면서 교착상태에 빠져 들었고, 그 해 7월 양측은 휴전회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회담은 소련 스탈린의 반대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1953년 3월 5일 스탈린 사망하자 그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영화를 보고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맥아더 장군 어느 한분이라도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졸지에 공산화되지 않았을까? 또, 맥아더 장군이 중공과의 확전(擴戰)이나 핵전쟁의 발상을 하지 않고, 그냥 한반도 내에서 전쟁을 종결했더라면, 우리 한국은 북한까지 포함하여 통일되지 않았을까? 트루만이 맥아더를 해임할 것이 아니라, 확전 반대의 뜻을 설득해서 잘 맥아더 장군이 휴전협정까지 체결하도록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맥아더 장군은 해임 직후인 1951년 4월 18일 귀국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곧 이어 뉴욕시에서도 역대급 환영을 받았다. 다음 날인 4월 19일 그는 미 상하원합동회의에서 은퇴연설을 했는데 이 때“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1964년 4월 5일 맥아더 장군은 사망하여 버지니아주 노퍽(Norfork)시에 세워진 더글라스 맥아더 기념관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 진 맥아더 여사도 2000년 1월 사망하여 장군 옆에 묻혔다. 맥아더 기념관에는 박물관과 기록연구관, 교육센터, 영화관, 안내센터, 기념품점 등이 있다. 필자는 이곳을 2016년 8월 부부동반으로 방문한 일이 있다.

고인의 공적을 기리며 그의 명복을 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