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호] 아프간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 이선호(경제 58학번, 코리아타임스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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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필리핀에서도 미군철수 후 불행한 사태, 한미군사동맹 강화해야 


지난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 의해 함락되고, 8월 30일 미군이 카불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 후 아프간은 다시 무자비하고 급진적인 정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소수민족과 언론인, 인권활동가들이 처형 당하고, 여성들은 사회활동이 전면 금지되었다. 수백만명의 난민들이 외국으로 탈출하고, 물가 폭등, 은행 폐쇄 등으로 경제는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 사태로 지난 20년간 값비싼 대가를 치뤄가면서 아프간에 모범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책임있는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미국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날 미군은 세계 여러 나라에 주둔하면서 주둔국의 평화 유지 및 안보에 기여할 뿐 아니라 경제 개발과 성장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 아프간의 비극적인 상황은 해외 주둔 미군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일깨워 주는 생생한 교훈이 되고 있다.


미국은 세계 85개국에 약 15만명 내지 20만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미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6월 30일 현재 미군은 일본(53,238명), 독일(35,438명), 한국(26,326명), 이탈리아(12,535명)와 영국(9,515명) 등 주요 5개국에 집중 파견되어 있다. 그 중 35년간의 일본 식민지통치로부터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한국을 제외하면, 다른 4개의 국가는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이나 연합국에 속해 있다. 미군은 이들 나라에 지역안보및 평화구축을 위해 배치되었지만 개발도상국에 있어서는 새로운 시장전략의 습득, 미국 신기술의 유입 및 대규모 병력에 의한 사회안정을 가져다 준다. 특히 미군이 새로운 기지를 건설할 때는 자재와 노동력을 현지에서 조달함으로써 지역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975년 4월 30일, 월남(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월맹(북베트남)군에 의해 함락되던 날을 기억할 것이다. 그날 주월 미국 대사와 직원들은 미해병대의 마지막 헬리콥터를 타고 대사관을 떠났고, 동시에 월남은 월맹에 의해 적화통일 되었다. 그 후 십수년 간에 걸쳐 6백여만명이 처형되거나 재교육 캠프에서 죽어갔고, 1백만명 이상의 난민들이 보트피플이 되어 남중국해 일대를 떠돌다가 그 중 상당수가 바다 위에서 목숨을 잃는 참혹한 삶이 계속되었다. 

이에 앞선 1973년 1월 27일, 월남전의 당사국인 미국, 월남, 월맹과 베트콩(월맹의 군사조직)은 역사적인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종전(終戰)을 선언했다. 이 협정에 따라 미군과 베트콩은 모두 월남에서 철수했으나 그 후 월맹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지원 받아 전력(戰力)을 증강시키고 있다가 1974년 12월 월남을 기습 침략했고, 1975년 4월 마침내 월남은 패망한 것이다. 월남에서의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은 한낱 속임수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또 많은 사람들은 1992년 11월 24일, 필리핀 루손섬에 위치한 수빅만 해군기지에서 미 해군이 완전 철수한 일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필리핀 사람들은 일부 반미주의자들의 선동에 휩싸여 “양키, 고홈(go home)!”을 외치면서‘미군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외국인 투자 공단을 만들면 글로벌 기업이 몰려온다.’고 시위를 했다. 결국 필리핀 정부는 미국과의 수빅만 임대협정을 중단했고, 미 해군은 필리핀에서 모두 철수했던 것이다.

남중국해에서 미군기지가 없어지자 중국은 바로 영해법을 선포하고 필리핀 앞바다의 팡가니방 산호초와 스카버러 섬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스카버러 섬은 남중국해에 위치하면서 그 동안 미 공군의 사격훈련 표적지가 됐고, 동시에 중국의 해양 진출을 봉쇄하는 방파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 방파제를 중국에 빼앗기면서 필리핀의 안보 환경은 극히 악화되었다. 게다가 기대했던 외국 기업들의 투자 및 공단 조성은커녕, 오히려 기존에 필리핀에 들어와 있던 외자(外資)들마저 썰물처럼 빠져 나가면서 경제 또한 침체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정치적 리스크가 큰 나라에 외국기업들이 투자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 이후 미국과 필리핀 양국은 1999년 방문군협정(VFA)을 통해 군사동맹 관계를 회복했고, 2001년 9.11 테러사태와 2002년 민다나오(남부 필리핀) 반군의 테러사태를 거치면서 양국의 군사적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종전선언은 곧 미군철수

오늘날 한미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갈등이 깊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는 출범 직후인 2017년 10월, 중국에 사드(THAAD)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미사일방어(MD)체계에 편입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은 맺지 않겠다는 이른바 ‘3불(不)원칙’에 합의했다. 2019년 8월 정부는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를 결정했는데 이는 한·미·일 삼각안보체제를 흔드는 일이어서 미국의 불만을 샀다. 미국이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정과 연계하며 압박해 들어오자 여권의 국회의원 47명이 미군철수 요구에 서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통령은 지난 9월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다시 한번 북미대화와 “종전선언”을 촉구했다. 지난 2018년 9월 유엔총회부터 벌써 4번째 제안이지만 ‘종전’은  주한미군 철수 외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정부는 나름대로의 의도와 정책 방향이 있을 것이겠지만 이와 같은 대북 평화공세와‘탈미친중’(脫美親中) 노선이 계속되면 자칫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주한 미군은 1945년 8.15 해방 후 3.8선 이남에 주둔했다가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6월 27일 철수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50년 북한은 6.25 전쟁을 일으켜 그 후 3년간 우리는 참담한 전란(戰갺)을 겪어야 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군은 다시 한국에 파병되었고, 휴전 후에는 1953년 10월 1일 체결된‘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지금까지 휴전체제를 관리해왔다. 따라서 이제라도 “종전”이 선언되면 주한 미군은 한국에 주둔할 이유가 없어진다.

주한미군의 병력은 휴전 당시 63,000명 수준에서 1971년 3월 이후 43,000명 수준,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28,500명 수준으로 감소되었다. 이 숫자 는 언제 어떠한 이유로 감축 또는 완전철수가 될 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는 1975년 베트남이나, 1992년 필리핀이나, 지난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우와 같이 극히 불행한 사태가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우리는 지금 6.25 전쟁을 계기로 맺어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한국은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의 호스트국이다. 북한이 전면적인 핵개발 활동을 멈추지 않는 한 미국과의 유대를 긴밀히 하면서 북한의 도발을 저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정치노선이나 좌우이념에 관계 없이, 한미군사동맹 강화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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