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호] 세기의 보물을 찾아서⑦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 한영국(경제 50학번, 금토상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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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이 무너질 때면 로마도 망한다.”7~8세기 위대한 성인의 한 사람인 영국의 성서학자 베다(Beda)가 남긴 말이다. 하지만 16세기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건축되고 그 안에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Pieta)>가 자리를 잡고 난 후에는 그 말이, “성 베드로 성당에 <피에타>가 무너지는 날에는 로마도 무너진다”로 바뀌었다.
성 베드로 성당은 원래 333년경 건축되었으나 1506년에 재건축을 시작하여 1626년에 완공 되었다. 성당 건물은 길이가 220m, 폭이 150m나 되며, 꼭대기 까지의 높이는 138m, 중앙 돔의 직경이 42m나 된다. 이스탄불의 동로마제국이 건설한 성소피아 성당보다도 엄청나게 큰, 세계 제일의 대성당이 바로 이 성당이다.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어로서 죽은 예수그리스도의 사체를 안고 슬픔에 젖은 성모 마리아의 상(像)을 뜻한다.
<피에타>를 조각한 미켈란젤로(1475~1564)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피렌체에서 가까운 카센티노 마을에서 태어났다. 피렌체(Firenze)는 암울한 중세를 벗어나 아름다운 문화와 경제적 풍요를 꽃피운 르네상스 시대를 상징하는 도시이다. 이 도시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건축물과 그림, 조각, 음악 등 엄청난 예술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소년시절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림에 만족하지 못하고 1년 후 조각가가 되겠다며 다시 메디치가(Medici家)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메디치가는 피렌체의 성주이자 나중에 유럽 금융계의 요람지 역할을 한 거대 부호세력이었다. 메디치가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일찍 알아차리고 가족의 한 사람처럼 받아들였고, 미켈란젤로로서는 당시 최고의 후원자를 만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메디치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미술품, 조각품 등이 그에게 훌륭한 교육자료가 되었고, 그로 하여금 조각가로 성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1494년 이 지역에 프랑스 군이 쳐들어오자 그 전란통에 메디치가도 쫓겨나고 미켈란젤로 역시 갈 곳이 없어져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1496년 로마로 갔다. 거기서 그는 피렌체의 은행가 야콥 갈리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사람 역시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차리고는 그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당시 대리석 조각가를 찾고 있던 드라고롤라 추기경을 소개해 주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조각 <피에타>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당시 드라고롤라 추기경은 미켈란젤로를 만나“나는 그 동안 아름다운 <피에타>상을 만들어 줄 조각가를 찾고 있었는데 이제 자네한테 부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당황하여“<피에타>라면 죽은 예수의 사체를 안고 있는 마리아 상을 말하는데, 마리아의 슬픈 모습을 어떻게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왈가왈부하다가 결국은 미켈란젤로가 추기경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작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모습과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미로 승화시킨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이 조각을 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직접 대리석 광산에 가서 연한 푸른 녹색의 거대 암석을 고르고, 로마로 가져온 후 약 1년간(1498~1499) 심혈을 기울인 끝에 완성시켰다.
원래 이 <피에타>의 조각상이나 그림은 북유럽 지방에서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작품들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로마에서는 드문 일이었는데 추기경은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상을 주문하면서“성모마리아가 로브(robe, 부인용 야회복)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주문을 했다고 한다.
우리들이 지금보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500여년이 지난 옛날 작품인데도 이 딱딱한 대리석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살아 있는 사람 같은 부드러움을 느낄 수가 있을까? 하고 감탄을 하게 된다.
죽은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은 신비로운 부드러움을 띄고 있는데 감히 인간의 손으로 어떻게 이와 같은 신묘(神妙)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가 있었을까. 또 예수의 축 늘어진 오른 쪽 손등을 보면 방금 십자가에서 끌려 내려와 피가 흐르는 못자국도 생생하게 보이고, 손등의 가느다란 혈관이 피부에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그래서 세상의 미술가, 조각가들이 절찬을 아끼지 않는 것에 우리들은 저절로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하나는 성모마리아의 다소곳이 숙인 얼굴의 슬픈 모습이다.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당시나 후세에서나 보는 사람들은 죽은 예수가 성인이 되어 있는데 성모마리아는 너무 젊게 보인다는 등 시비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미켈란젤로가 직접 이렇게 말했다.
“성모마리아의 순결성을 감안하면 그녀는 늙지 않은 처녀성과 순결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이 되었습니다.” 범속한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음은 삼가해 달라는 점잖은 꾸짖음으로 해석된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는 <피에타> 말고도 저 유명한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있다. <천지창조>는 곧 시스티나성당의 천장벽화를 말하는데 이는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의 주문, 아니 반 강제적인 명령에 의한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은 조각가지 화가가 아니라고 투덜댔지만 교황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1508년 5월 10일 마침내 이 역사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천지창조>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9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9장면이란〈빛과 어둠의 창조〉,〈달과 해의 창조〉,〈하늘과 물의 분리〉,〈아담의 창조〉,〈이브의 창조〉,〈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추방〉, <노아의 희생>, <대홍수>, <술에 취한 노아> 등인데 실제로 미켈란제로는 성서의 순서와는 반대로 <술에 취한 노아>부터 그렸다.
이 천장벽화는 4년이나 걸려 1512년 10월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실제 그린 기간은 2년 정도였다. 교황청에서 봉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 조수들이 모두 떠나버리는 바람에 작업이 중단되었고, 새로 고용한 조수들은 실력이 좋지 않아 나중에는 거의 미켈란젤로 혼자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미켈란젤로는 발판 위에 누워서 경직된 자세로 일해야 했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안료로 인해 눈병도 생겼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와 동생들이 돈을 달라고 졸라대는 지옥같은 상황에서 이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이 천장화와 더불어 시스티나 성당에는 제단(祭壇)벽화 <최후의 심판>이 있다. 1535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작업을 완성시킨 것은 바오로 3세 때인 1541년. 작업을 시작할 당시 60세였던 미켈란젤로가 어느덧 66세가 된 해였다. 최후의 심판에는 그 유명한“단테의 신곡(神曲)”에 나오는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연상케 하는 3단계 비슷한 환경에서 죽은 자도 산 자도 다함께 이 세상에서 죄지은 자가 벌을 받는, 착한 자가 구제되어 천당으로 다시 승천하는 모습들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보면 나는 어디쯤 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나는 것은 인간 본성의 나타남이라 할까. 미켈란젤로는 이 <최후의 심판> 그림속에 약 390여명의 인물화를 그렸는데 그 중간쯤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성도 한 사람에게 인간 껍데기만 남은 미켈란젤로가 연옥에서 건져 올려진 모습이 있다고 하는데 요즘 같은 시대 관광객으로서 여기까지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렵겠다 싶다.
이 작품은 1541년 10월 31일 낙성식을 했다. 일설에는 낙성식 당일 벽화를 본 바오로 3세가 무릎을 꿇고“하느님, 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는 어떻게든 잔머리를 굴려 권력을 쥐고, 부자가 되고, 죄를 짓고도 법망을 용케 빠져나가 구석에서 미소짓는 인간이 많이 있다. 그러나 저 세상에는 하느님이 절대 간과하지 않은 준엄한 심판대가 기다리고 있으며, 지옥에는 그런 사람이 갈 자리가 언제든지 비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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