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호] 리어카에 실은 꿈 / 한상영 (경제 83학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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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영 변호사
필자는 대학 졸업후 새한종합금융(주)이라는 금융회사에 입사하여 평탄한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회사가 부도를 맞고 파산했다. 당시 필자는 아내와 두 딸을 둔 가장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심하다가 사법시험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결국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생활을 한지도 벌써 16년이 된다.
사법시험 준비를 위해 살던 집을 처분하고 차도 판 후 고시생이 밀집하던 신림동으로 이사했다. 본격적인 시험 준비에 돌입했으나 경제학과를 나왔기 때문에 같이 공부할 법대생 동료가 없었다. 마침 초반에 먼저 변호사가 된 고등학교 친구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금도 그 친구의 헌신적인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법 공부는 특히 케이스 스터디가 중요했다. 가상의 케이스를 놓고 몇 사람이 함께 토론하는 방식이다. 토론을 통해 법적인 쟁점이 쉽게 파악되고 2차 논술시험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변호사인 친구가 스터디 멤버를 소개해 주었다. 매일 아침 새벽 6시에 기상하여 뒷산의 관악산 자락을 산책하며 케이스 스터디를 했는데 올라갈 때 1개, 내려갈 때 1개를 토론했다. 나중에 멤버 한 명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스터디 그룹은 해체되었다.
그러다 새한종합금융에서 같이 퇴직한 후배 1명을 신림동에서 만났다. 그 후배도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여 법적 지식이 어느정도 쌓여 있는 상태였다. 다시 아침 일찍기상하여 그 후배와 함께 관악산 자락 등산을 하며 스터디를 시작했다. 그 후배는 가족은 서울 시내에 살게 두고 혼자서 신림동에 거주하며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가족들이 더 이상 합격을 기다릴 수 없어 결국 사법시험을 포기했다.
졸지에 토론 스터디 멤버를 잃게 되어 다시 스터디 멤버를 구해야 하는데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나이가 30대 후반에 접어들었고 법대를 나오지 않아 같이 공부할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은 멤버 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아내가 차선책으로 녹음하며 혼자 강의하듯이 공부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녹음을 위해 신림동 높은 지대에 있는 어느 집의 방 한칸을 빌렸다. 그 방으로 가져갈 책들이 많아서 책을 운반하기 위해 리어카를 빌렸다. 차는 신림동으로 이사 오며 이미 처분해 버렸기 때문이다.
리어카에 가득 책을 싣고 멀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가야 했다. 나는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었다. 법 서적은 두께가 두껍고 양도 많아서 무게가 매우 무거웠다.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아내는 뒤에서 끙끙대며 힘들게 리어카를 밀었다. 길 주변에는 많은 젊은 고시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즐기고 있다가 30대 후반의 남자가 아내와 끙끙대고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이 신기한지 흘깃 쳐다보았다.
두 딸까지 딸린 마당에 때늦은 공부를 한답시고 애꿎은 아내를 고생시키며 리어카를 끌고 가려니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슴에 있었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묵묵히 올라갔다.
빌린 방에서 녹음기를 틀어 놓은 상태에서 법 교과서를 펴 놓고 나 혼자 스스로 소리 내어 강의를 했다. 내가 나 자신에게 강의하는 셈이었다. 방안에 나 혼자 밖에 없었지만 말로 소리 내어 낭독을 하면 머릿속에서 법적 쟁점이 잘 정리가 되었다.
몇 개월 동안 혼자 녹음하며 공부를 계속했다. 그렇게 나 홀로 강의하며 녹음하는 것도 힘이 들고 재미도 없던 차에 아내가 케이스 스터디의 파트너가 되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공부 장소가 다시 독서실로 바뀌자 지난번처럼 리어카에 책을 가득 싣고 독서실로 운반했다. 독서실 주변에 있는 젊은이들의 시선은 여전히 이상한 듯했다. 하지만 무거운 책을 독서실로 함께 나르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힘을 다시 내었다.
정말 사회적으로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9년 동안 가지고 다니던 새한종합금융회사의 번듯한 명함도 더 이상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학교의 어떤 서류에 적어야 한다며 “아빠의 직업을 무엇이라고 써야 해야 해?”라고 물었을 때 나의 마음이 무척 아팠다. 나로 인해 어린 딸이 학교에서 혹시나 무시나 당하지 않을까 정말 미안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아내와 두 딸이 나와 함께 지금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이 터널을 통과하면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2차 시험은 논술시험이기 때문에 케이스 스터디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법에 대해 완전 문외한인 아내가 케이스 스터디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아내는 이미 1차 시험을 볼 때마다 시험장에 같이 동행하며 계속 나를 전심으로 지원해 주고 있었다. 1차 시험에서 오전 시험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아내는 나의 긴장감을 풀어 주고 소화가 잘되도록 운동장 한가운데서 나와 함께 우유 팩으로 제기차기 놀이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에서 제기를 차는 우리를보고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아내는 나의 스터디 멤버처럼 마을 뒤 관악산 자락 산행을 같이했다. 산을 오르며 특히 2차 시험과목을 중심으로 하나씩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행정법, 상법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법을 좋아하지도 않고 전공도 하지 않은 아내가 나의 설명을 이해할 리가 만무했다. 설명하는 나 자신도 이런 법률 과목들을 많이 공부해 놓지 않은 상태라서 설명하면서 버벅댔다. 하지만 내가 어떤 법 내용을 아내의 귀에 대고 말을 하면, 아내는 그저 나의 설명에 장단을 맞추어 “응, 응”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내가 산에 오르며 혼자 중얼거리면서 나에게 독백으로 말하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라도 산에 대동하면 일단은 대화의 형식이 된다. 나로서는 아내가 이해하든 말든 아내를 상대로 말을 하면 법적인 내용이 내 머릿속에서 명쾌하게 입체적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그렇게 산에 올라가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아내와 우유 팩 제기차기를 했다. 그렇게라도 나의 건강을 챙겨야 했다. 아내는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내 건강을 위해 제기차기를 같이 해주었다. 제기차기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다시 아내 귀에 대고 어려운 법 내용을 설명하면 아내는 여전히“응, 응”하고 응답했다.
그렇게 산 밑으로 내려오면 관악청소년회관 실내로 들어가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다시 아내 귀에 법 내용을 소곤거린다. 피곤에 지친 아내가“응, 응”대꾸하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고 나중에는 나지막하게 코 고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아내의 귀에 법 내용 설명을 계속했다. 아내가 듣든 말든.
어느 날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뒷산으로 가며 여느 때처럼 아내와 스터디를 했다. 물론 나의 일방적인 독백과 같은 설명이지만, 아내 귀에 대고 법 내용을 설명하고 아내가 또 형식적인 응답을 시작한다. 앞에서 저만치 가고 있는 작은딸이 아빠를 뒤돌아보더니 엄마가 대답할 타이밍을 얼른 가로챈다. 그러고서는 “그런 거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해 줄게”라고 말하고는 자기가 “응, 응”하기 시작한다.
작은 딸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다. 잠시 아내 대신에 작은딸 귀에다 법 강의를 시작한다. 참 신기하다. 어린 딸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응, 응”대답만 해주는데도 내 머릿속에서 법 내용이 잘 정리되는 것이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엉뚱한 방법으로 2차 시험을 준비했다.
1년 6개월을 아내와 그렇게 준비했다. 온 가족이 함께 2차 시험을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아내는 나와 함께 했던 그런 희한한 스터디 기간이 끝나고서도 그 뒤로 한참 동안 아내 귀에서 내 말이 계속 맴도는 것 같다고 했다.
2003년 여름에 본 두 번째의 2차 시험에 최종 합격하였다. 2차 시험은 특히 행정법이 어려웠다. 그 해 그 과목에서 대거 과락이 발생하여 아깝게 떨어진 수험생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나는 행정법을 포함한 2차 시험 모든 과목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의 귀에 속삭이며 내 머릿속에서 입체적으로 정리해 놓은 탓이다. 4년 6개월에 걸친 전력 질주가 마침내 끝났다. 온 가족이 힘을 합쳐 가능한 도전이었다. 우리가 걸어 온 그 길에는 아내와 두 딸이 함께 흘린 땀들이 가득하였다. 리어카에 실은 아내와의 시간, 아내의 귀에 속삭이던 수많은 단어들, 좋아하며 우리의 길을 따라와 준 두 딸의 모습은 우리의 앞날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의 세포가 되었다.
■ 한상영 변호사
1990년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새한종합금융에 입사하여 8년 근무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회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가자 1998년 명예퇴직하고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2003년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었으며, 법무법인 백석 대표 변호사를 거쳐 현재 열린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삶의 세포가 된 꿈>을 출간했다. 위 글도 이 책에 실려있다.(29면 동문신간안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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