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호] 대한민국 산업화와 함께한 나의 반평생(1) / 김인호 (상학 61학번, 한양대 명예교수)

작성자 정보

  • 편집부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047bd79853bcc665fa31e40aa9ae6fff_1627520908_7109.jpg


포항제철 건설, 한국통신의 전자통신 타당성을 연구하다


필자는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복무했다. 중위 제대를 두어 달 앞둔 1969년 4월 어느 날 대학 선배에게 스카웃되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KIST에서는 곧바로 경제연구분석실에 합류하여 당장 포항제철소(현POSCO) 건설타당성연구의 실무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이미 국제제철차관단(KISA)에서 2년여에 걸친 연구 끝에 철강의 내수규모가 최소 적정생산규모보다 적기 때문에 그 타당성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정부는 KIST를 설립하고 해외, 특히 미국으로부터 한국인 과학자들을 유치하면서 KIST로 하여금 이 프로젝트에 대해 독자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포항제철소건설 타당성연구는 이렇게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제철 플랜트에 대한 전문성도 경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실무책임자로 합류하게 되었지만, 필자는‘내수초과분을 과연 수출할 수 있을 것인가?’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어 수출가능성 여부를 입증하는데 집중했다. 솔직히 말해“타당성”이란 말조차도 들어 본적이 없는 필자는 대학후배 총각들로 실무팀을 만들고, 연구소 내 숙소에서 합숙하면서 밤새도록 고민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누군가가 일러준 중력법칙(gravity law)을 원용한 철강수출계량모델을 도출하여 포항제철의 사업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연구를 토대로 1970년에 포항제철이 건설되기 시작하여 1973년 첫 출선(出銑, 용광로에서 철을 뽑아냄)의 기쁨을 온 국민들에게 안겨주었다. 이 포항제철 건설을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중심의 산업화 행보를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047bd79853bcc665fa31e40aa9ae6fff_1627521419_329.jpg
포항제철 기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          
                                          


그런데 포항제철소 건설이 한창이던 1971년에 필자는 다시 제2종합제철플랜트 타당성 연구프로젝트를 맡게 되었고, 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광양제철소(전남 광양) 건설계획이 마련되었다. 이 제철소는 300만톤 규모로 시작하여 최종 1200만톤 규모의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는데 1972년 국영기업 형태로 발족하였으나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순연되었다가 후에 포항제철에 흡수되었다.


한편 KIST는 당초부터 재단법인으로 출범하였는데, 이는‘기술개발 없이 산업화 성공을 기대할 수 없고, 재정자립 없이 기술개발을 기대할 수 없다.’며 미국 존슨 대통령이 2천만 불(당시 대한민국의 외화보유고는 9천2백만 불이었음)을 기술개발기금으로 지원해준데 힘입은 것이었다. R&D 관리시스템 일체는 미국 배틀(Battelle)연구소의 hardware와 software를 그대로 이식시킨 것이었는데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연구자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동시에 책임을 지게 하는 책임회계제도였다.


필자는 광양제철 타당성연구를 끝내고 1973년 초반에 연구부문에서 R&D 기금관리 실무책임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해 10월 중동에서 6일 전쟁이 일어나고 유가 폭등으로 인한 1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기금가치의 증식보다는 그 가치를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필자는 기금관리 경험을 통해 주식회사의 본질과 자본조달을 위한 주식 발행시장과 유통시장과의 관계에서 유통시장은 필요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시 5개 시중은행의 자본금이 각각 3억 원이었고, KIST의 기금규모는 22억이었는데 고금리에 힘입어 이 기금을 32억으로 늘려 놓았다. 그후 필자는 1976년에 다시 연구기관으로 옮겨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KNFC(한국핵연료개발공단), KAERI(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연구실장/기획실장, 기획부장 그리고 선임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KIST 재직기간을 포함한 10여년간 필자는 철강/특수강/비철, 금융, 전자통신, 전자, 에너지, 교통, 핵연료, 항공분야의 투자 사업에 대한 타당성연구를 수행하면서 세계 산업주도권의 부침(浮굸)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값진 기회와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1981년에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는 그 동안 필자의 손을 거쳤던 투자 사업들이 성공적으로 순항(順航)하고 있음에 뿌듯함을 느끼며, 그 성공원리를 이론적으로 구명(究明)하고 싶은 강렬한 연구욕구를 갖게 되었다. 마침 1980년대 중반 정부는 산업화를 지원하는 통신 인프라를 현대화하기 위해 체신부를 개편했다. 즉 체신부의 정책기능과 사업운영기능을 분리하여 체신부는 정책기능만 맡고 사업운영부문은 공기업형태의 한국통신공사(KTA, 현 KT의 전신)가 맡도록 정책전환을 단행한 것이다. 그 후 정부는 1987년 KTA의 전기(electrical)통신시스템을 전자(electronic)통신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KTA 발전전략(안) 연구를 필자에게 의뢰해 왔다. 이에 필자는 1980년을 전후한 디지털 혁명과 그 추세전망, 그리고 198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기 시작한 미소양국체제의 붕괴가 전 세계통신 분야에 어떤 충격을 줄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였고, 그 결과로 ATTACK 전략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ATTACK은‘Advanced Total Telecom Advantage Creating KTA: 첨단의 유·무선의 전자통신을 통해 우위를 창출하는 KTA가 되라’는 뜻의 전략 슬로건이다.


필자의 전략(안)에 KTA는 만족함을 표하며 전사적으로 전략선포식을 거행하고 이를 드라이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KTA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하려면 아무래도 세계적인 컨설팅사의 연구결과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하바드대 경영대학원 마이클 포터 교수팀의 Monitor컨설팅사에게 동일한 내용의 연구프로젝트를 맡겼다. 십 수 개월 후 Monitor사의 최종연구결과 발표가 있었는데 그들의 연구내용에는 전자통신기술의 발전과 추세전망은 물론, 미소양극체제의 붕괴가 통신에 미칠 충격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담겨있지 않았다. 필자가 이 점을 지적하면서 실망을 드러내자 Monitor사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해프닝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은 필자로 하여금 감히 동태경영(Dynamic Management)이라는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독자적으로 계발하고 싶은 강한 열망을 안겨주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알림 0